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대중관계 (문단 편집) == [[고대 로마]] == 고대 로마는 "대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서쪽 멀리 있는 꽤 대단한 나라 정도로 인식된 듯하다. 서기 97년, 한나라는 로마 제국에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서 감영을 파견하여 교류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고 호위를 위한 장군도 붙여주는 등 꽤나 성대한 규모였으나, [[파르티아]]를 지나다 방해받으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파르티아가 지정학적 위치상 동서양 중계 무역로로서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직통루트 뚫지 않을까 우려한 것. 다만, 감영은 당시의 [[로마 제국]]이 양자에게 제위를 세습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성과를 내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오현제]]의 치세가 진행되던 시절로, [[네르바]] 황제는 양자 [[트라야누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166년에는 로마의 사절을 자처하는 선박이 도착, 이들 때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한서]]에 '대진왕 안돈(大秦王 安敦)'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중국]] 역사서에 언급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아직 사산조가 등장하기 전 시점에서도, 사실 기원전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각각 [[박트리아#s-3|그리스계]] [[인도-그리스 왕국|왕국]]이 100년 정도 존재한 적이 있는 등, "[[형이 왜 거기서 나와|왜 이 양반들이 여기서 나와?]]" 소리가 나오는 일이 꽤 있는지라 교류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굉장히 헷갈렸을 듯 하다. 중간에 그리스 문화가 로마의 주류 문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도 하고. 게다가 사산조가 대두될 쯤에 와서는 로마가 기독교로 개종해버렸다. 게다가 중세 중반쯤에 와서는 [[동서 대분열]]까지 일어나 버렸다. 위략에는 고대 공화정 로마의 [[독재관]] 제도에 대해 꽤 정확한 서술이 있고, 후한서에는 앞서 언급한 166년에 최초로 대진국에서 바친 조공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대진국 선박이 도착한 위치가 베트남인 데다가 조공품이라고 기록된 것[* 코끼리가 있다고 인도에서 보낸거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저 시대에는 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멀쩡히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코끼리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진기한게 하나도 없어서 (저 시절엔 중국에도 코끼리가 멀쩡히 있었다.) 미심쩍은 것. 후한서에도 진귀한 것이 없다며 뭔가 이상하다고 기록되어있다.]도 뭔가 허술하고 로마 역사서와의 교차 검증이 되지도 않는다.[* 시점상 로마 쪽에 기록이 깔끔하게 남기 좀 어렵긴 하다.] 애초에 후술하는 "불름국"과의 교류와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그 이후에도 진짜 대진국이 보낸 조공인지 미심쩍어했다. > 대진국(大秦國) 일명 이건(犂鞬)이라고도 한다. 바다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해서국(海西國)이라고도 부른다. 그 땅의 둘레는 수천 리이며 400여 개의 성들이 있고 복속하고 있는 소국들도 수십이다. 돌로 성곽을 짓고 우정(郵亭)을 줄지어 설치했으며, [[시멘트|모두 석회로 그것을 칠한다.]] 소나무와 동백나무와 여러 나무들 및 갖가지 풀들이 있다. 사람들의 풍속은 힘써 농사를 짓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뽕나무를 심는다. 모두 머리를 깎고(髡頭) 무늬가 수놓여진 의복을 입으며, 가벼운 수레나 흰 덮개가 달린 조그만 수레를 타고, 출입할 때에는 북을 치며 각종 깃발을 내건다. 거처하는 성읍은 둘레가 100여 리이고, 성 가운데에는 5개의 궁이 있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각각 10리이다. 궁실에는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세웠고 식기도 역시 그러하다. 그 왕은 하루에 하나의 궁에서 지내기 때문에, 사무를 보는 것이 닷새가 지나면 (다섯 궁 전체를) 돌아다니게 된다. 항상 사신 1명에게 주머니를 지참하고 왕의 수레를 따라다니게 하는데,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사항이 있으면 곧 글을 써서 그 주머니 안에 던져 넣고, 왕이 궁에 도착하게 되면 (주머니를) 열어서 그 옳고 그름을 심리한다. 각각의 문서를 관리하는 관아가 있다. 36장(將)을 설치하고 모두 모여서 국사를 논의한다. 그 왕은 고정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모여서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세운다. 나라 안에 재난이나 풍우가 갑자기 생겨나면 그를 곧 폐위하고 다른 사람을 바꾸어 세우며, 축출되는 사람은 즐겨 물러나지 원망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마음은 평정하여 중원의 나라와 닮은 바가 있으므로 그런 연유로 ‘대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 (중략) > > 대저, 바깥 나라의 여러 진기한 물품들이 모두 나온다. 금은으로 화폐를 만들고 은전 10닢이 금전 1닢에 해당된다. [[파르티아|안식]]·천축(天竺)과 바다 가운데에서 교역하며 이익은 10배가 남는다. 그 사람들은 소박하고 정직하며 시장에는 두 가지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곡식은 항상 값이 싸며 나라의 경비는 풍부하다. 이웃 나라가 사신을 보내 그 경계에 도착하여 신고하면 역마에 태워서 왕도(王都)로 보내며, 도착하면 즉시 금전을 지급한다. 그 왕은 항상 한나라와 사신으로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안식이 한나라의 채색 비단(繒綵)을 그들에게 건네주며 장사를 하기 때문에, 중간에서 차단하고 막아서 그들 스스로가 한나라에 도달하지 못한다. 환제 연희 9년(166) 대진왕 안돈(安敦)이 일남(日南)의 변경 밖에서 사신을 보내 상아·서각(犀角)·대모(瑇瑁)를 헌상했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한 번 교통한 것이다. 그들이 상표를 올려 공물을 바친 것은 모두 진기한 것이 없었으니, (대진에 관한 내용을) 전하는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혹자는 이르기를, 그 나라의 서쪽에 약수(弱水)와 유사(流沙)가 있고,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하는 곳이 가까우며, 태양이 들어가는 곳과 가깝다고 한다. 『한서(漢書)』에 기록된 바 “조지에서 서쪽으로 200여 일을 가면 태양이 들어가는 곳과 가깝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오늘날의 책(今書)과는 다른 것이다. 과거에 한나라 사신들이 모두 오익산리까지 [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조지에 도달한 자가 없었다. 또한 이르기를, “안식에서 육로로 바다를 돌아서 북쪽으로 가면 바다의 서쪽으로 나와 대진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 연이어 살고 있고, 10리마다 1정(亭)이 있고 30리마다 1치(置)가 있으며, 도적의 약탈을 알리는 경보는 시종일관 없다. 길에는 사나운 호랑이와 사자가 많아 여행자들을 막고 해를 끼치는데, 100여 명이 안 되면 무기를 갖고 가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잡아먹히는 바가 된다.”라고도 한다. 또한 이르기를, “비교(飛橋)가 수백 리나 뻗쳐 있어 가히 바다 북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여러 나라에서 나오는 기이한 옥석과 여러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는 거짓과 괴이함으로 가득차 대부분 황당한 내용이므로 여기에 기록하지 않겠다. >---- > [[후한서]]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jo.k_0003_0118_0110_0010&setId=152412&position=2#self|번역출처]] 후한서의 기록을 끝으로 공식적인 역사 기록엔 공식적으로 "대진국의 왕" 명의로 보내진 조공은 없다고 되어있다[* 다만, 같은 시기에 [[로마 제국]]에서 온 상인들이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손권]]([[삼국지]]에 나오는 그 사람)을 알현했다는 기록은 있다.]. 사실 전근대 중국에선 무역대금 지불 혹은 선물=대중화 위엄에 굴복하며 조공으로 생각한지라 그냥 선물 같은걸 줬을수도 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로마 제국|로마인]]의 후손들이 [[전한]] 시기의 [[중국]]에 일부 정착했다는 떡밥이 돌았고, 그 장소가 바로 중국 [[간쑤성]]의 [[융창 현]]에 있는 [[https://en.wikipedia.org/wiki/Liqian|리첸]]이라는 마을이다. 리첸마을 주민들이 [[유라시안]]의 모습을 띄고있기에 이 리첸 마을의 주민들의 조상이 [[카르헤 전투]] 당시에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인 [[크라수스]]의 지휘 하에 [[파르티아]]군과 싸웠다가 패배하여 포로가 된 로마인 병사들이라는 설이 있다. 기원전 36년 질지 공성전 당시 흉노군 보병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밀집 대형을 이루며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덥스는 이들을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힌 로마군으로 추정했지만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중무장하고 밀집 대형으로 전투를 벌이는 보병이 인도-그리스계나 소그드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학계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여하튼 당시 한나라 군에게 사로잡힌 흉노 포로 상당수가 간쑤성 각지에 정착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하플로그룹]]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리첸 내 자래채(者來寨) 마을 주민들의 하플로그룹의 56%는 캅카스 계통 남성의 하플로그룹에 속하지만 로마인 후손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간쑤성]]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가까운 곳이고, 과거에 [[토하라인]], [[에프탈]]인, [[바스밀]]족 등의 [[인도유럽어족]]계 혹은 [[튀르크]]계 주민들이 살던 곳이라서 이곳의 한족들은 그들과 오래 전부터 혼혈이 있었던 지라, 실제로 [[로마 제국|로마인]]의 피가 섞였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로마인의 피가 흐르는 [[중국인]] 마을이라는 떡밥은 지역 관광산업 육성에 있어 좋은 이슈가 되었고, 그래서 [[고대 로마]]의 군인들의 사열식을 재현하는 행사를 마을 축제마다 실시하고 지역예산 및 투자자금을 들여 로마식 건축물들도 마을 곳곳에 들어섰다. 중국 내의 작은 이탈리아 마을이 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온 영화가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